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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의 이해/학술

[조선기행록] 고토 분지로 지음

by 푸른길북 2010. 12. 13.

 

 

한반도의 산맥 체계를 창안한 고토 분지로,

그가 바라본 100년 전의 우리 땅이 눈앞에 생생하게 다가온다.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는 일본 메이지 시대의 대표적인 지질학자로,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있는 ‘태백산맥, 소백산맥’ 등과 같은 산맥 명칭과 그 체계를 최초로 창안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런 업적에 비해 고토 분지로에 대한 국내 학계의 평가는 유보적으로, 그가 제기한 이론은 현재 많은 오류를 지적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기의 일본인 학자라는 이유로 그의 탐사 기행 의도 등에 대한 비판이 끊이질 않고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 이러한 비판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그가 창안한 조선의 산맥론은 여전히 지리학의 주요한 지식체계로 남아 있으며, 그의 이름 또한 한국 지질학과 지리학사를 설명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이러한 상황을 차치하고라도 우리 역사상 최초의 탐사 기행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의 지질에 대한 그의 저술이 국내에 번역된 적이 없었다는 점은 실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까닭을 학문적 연구 상에서 안타깝게 여기던 부산대 손일 교수(지리학과)가 이번에 고토 분지로가 쓴 대표적인 글 2편을 발굴, 책으로 묶어 100년 만에 『朝鮮기행록』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 출간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번에 출간한 『朝鮮기행록』(부록 ; 조선산맥론)에는 고토분지로의 저술에 함께 포함되어 있던 당시 조선의 지체구조에 관한 컬러 지질도, 지체구조도, 탐사 기행 사진 등을 원서에 최대한 가깝게 복원하여 수록하고 있다.

책의 본문격인 「朝鮮기행록」의 원본은 1909년 동경제국대학 이과대학 기요에 발표한 “Journeys through Korea”이며, 부록으로 게재된 「조선산맥록」은 1903년 앞의 같은 학술지에 발표한 “A Orographic Sketch of Korea”이다. 「조선산맥록」의 경우, 「조선산맥대계」 혹은 「조선지질구조론」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논문으로,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산맥 체계의 근간을 제공한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朝鮮기행록」은 고토 분지로가 조랑말 4마리에 6명의 대원이라는 초라한 답사대를 끌고 조선 남부를 동서로 3번 횡단한 뒤 관찰된 노두를 근거로 지형, 지질 일반, 암석학적 분석을 제시한 지질 답사기이다. 고토 분지로는 동경제국대학의 교수로 재직 당시인 1900년 말부터 1902년 초까지, 매 겨울마다 한반도의 지체구조의 연구를 위해 조선을 방문하게 되는데, 그는 한겨울의 맹추위나 열악한 답사 환경에도 아랑곳없이 동해에서 서해로, 서해에서 동해로 한반도를 가로지르고 오르내리며 개마고원, 두만강 하류, 금강산, 지리산, 육십령 등을 누비고 다녔다. 「朝鮮기행록」에는 그 중 남부 지방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게 실려 있는 것이다. 또한 고토 분지로가 직접 작성한 컬러 지질단면도와 지질도를 포함하였을 뿐만 아니라, 각 읍내의 도입부에 그 지역의 경관, 산업, 주민, 역사 등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당시로서는 첨단기술에 속했을 실제 사진 99컷도 수록하여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朝鮮기행록』의 글을 통해 무엇을 얻을지는 관련 연구자 및 관심 있는 일반 독자들 각자의 몫이겠지만, 우리의 근대 지리학사에서 대표적인 인물로 거론되고 있는 한 일본인 지질학자가 직접 보고 겪은 100년 전 조선의 모습을 살펴보고 그의 연구 논문을 실제로 마주하는 것은 비단 지리학이나 지질학을 공부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우리의 근대사에 관심 있는 사람에게도 뜻 깊은 일이 될 것이다.

 

책 속에서

 

“나주 읍내는 … 관공서 건물들은 비교적 크지만 비어 있다. 성벽 안의 대부분 공간은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 주민들은 풀이 죽어 있고 침묵하고 있다. 청일전쟁 직전에 일어난 동학혁명의 고통 때문에 전체적인 분위기는 텅빈 공허한 장소, 바로 그것이었다. 인근에 임씨 가문의 양반 거주지가 있었다고 한다.”(108쪽)

 

“끊임없는 벌목으로 그 가치는 낮아졌지만, 이곳은 조선 왕실의 삼림보호지역이다. 전 황제의 아버지로, 악명 높았던 고 대원군은 자신이 집권하자 호사스러운 궁궐을 짓기 위한 목재를 이 산에서 구했다. 현재 이 궁궐은 서울에 있지만 인적은 끊어져 있고, 조선 사람들이 이야기하듯이 나라도 거의 망해 가고 있다.”(154쪽)

 

“대구는 조선 반도에서 네 번째 큰 도시이며 조선 남부에서는 가장 큰 도시로, 인구는 15,814명이다. … 1901년 3월 8일 이곳에 도착했는데, 마침 축제일이었다. 흰옷 입은 시민 모두가 대규모 줄다리기 경기를 보기 위해 남쪽 구릉에 모여들었다. 이 경기는 경상북도 감사와 자신의 아내들을 포함한 수행원들의 참석으로 절정을 이루었다.”(300쪽)

 

차례

 

서론

1장 1차 횡단여행

부산 | 마산포 | 진주 | 목포에서 남평, 동복, 옥과를 경유해 순창에 이르는 구간에 대한 지질 노트

2장 2차 횡단여행

목포 | 광주 | 남원 | 대구 | 해안 여행 그리고 경주로

3장 3차 횡단여행

Ⅰ. 전주-남원 간 지질단면

Ⅱ. 상부경상계 분지 혹은 노령산맥 지역

진안에서 용담과 무주까지 추가 답사 | 매가 혹은 마카우-대흑산군도의 한 도서

제주도

4장 요약

A. 기후

B. 산지

C. 지질층의 요약

후기

도판

 

부록 - 조선 산맥론

1. 서론

2. 조선의 북부와 남부

3. 산맥론

A. 한 지역

B. 개마지역

C. 고조선 지역

4. 결론 및 요약

도판

 

옮기고 나서 - 고토 분지로의 생애와 업적

 

집필진

 

지은이 :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

고토 분지로는 메이지 시대 일본의 대표적인 지질학자이다. 1881년 동경대학 지질학과를 졸업한 그는 4년간의 독일 유학을 거쳐 1886년부터 동경대 교수로 역임한 후 1935년 향년 79세로 사망했다. 고토 분지로는 서양 지질학의 일본 도입 과정과 정책에 절대적인 기여를 하였고 전문학술지 『지학잡지(地學雜誌)』의 창간에 관여했다. 또한 현 일본지질학회의 전신인 동경지질학회의 창립과 『지질학잡지』의 발행에도 크게 기여했다. 학문적으로는 지질학과 지형학, 암석학 등의 분야에서 특기할 만한 성과를 보였다.

특히 우리나라 지리, 지질과 관련해서는 “An Orographic Sketch of Korea(조선 산맥론)”, “Jouneys through Korea. First Contribution(한반도 기행)”, A catalogue of the romanized geographical names of Korea by Koto and Kanazawa(고토ㆍ가나자와식 로마자 조선 지명 목록) 등의 논고를 남겼다.

 

옮긴이 : 손일(孫一)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지리교육과 교수이다.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지리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사우스햄튼 대학교에서 지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도와 거짓말』, 『지도전쟁』, 『휴먼 임팩트』(공역), 『메르카토르의 세계』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