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 년 전부터 시작된 경이,
벼농사와 문명을 둘러싼 수수께끼를 풀다
나지막한 비탈에 햇빛을 반사하며 찰랑이는 물로 가득 찬 다랑논들이 층층이 포개져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오랜 세월에 걸쳐 인간의 손길로 일구어온 벼농사의 경관은 도시나 사원, 왕궁의 유적과는 또 다른 경이감을 선사할 것이다. 경이감만이 아니다. 이 경관을 통해 인류는 정착하여 예술과 문학을 꽃피우고 문명을 진전시켜왔다.
그러나 이 쌀과 문명의 관계에는 여전히 미스터리가 남아 있다. 왜 비슷한 환경에서도 어떤 곳은 논농사를 짓고 어떤 곳은 짓지 않는가? 벼농사에 적합해보이는 환경에서 벼농사에 관심이 없거나 척박해보이는 환경에서 벼농사에 열정을 갖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시아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마다가스카르가 다분히 동아시아적인 벼농사기법을 간직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궁극적으로 수경 벼농사는 과연 특정한 문명에서 나온 결과물인가? 아니면 그 특정한 문명을 이끌어낸 동인인가? 찬란한 벼농사의 경관을 보고 ‘쌀의 문명’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아니면 ‘쌀과 문명’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중국에서 고도로 발달한 문명은 벼농사가 적합하지 않은 창링의 북부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이때까지 조와 밀을 주식으로 삼았던 중국인의 선조는 이후 남쪽으로 퍼져 나가 양쯔 강 유역에서 벼농사를 지으며 중국 문화를 형성하였다. 마찬가지로 인도에서도 기장과 밀을 주식으로 삼던 사람들이 위대한 문명을 형성하였고, 이후 벼농사가 재배 가능한 인도 전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따라서 ‘쌀의 문명’이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앞서 언급한 사실을 인정한다면 ‘쌀과 문명’이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 수경 벼농사는 단지 문명을 발생시킨 일부분일 뿐이다. 물론 벼농사 덕택에 아시아의 여러 농촌 지역은 인구밀도가 높다. 또한 벼농사에는 수리시설과 보호 제방작업을 위한 정치적 고려도 뒤따른다. 말하자면 아시아의 위대한 문명은 쌀이 아니라, 이푸가오의 주민처럼 별다른 욕심 없이 벼를 열심히 경작했던 농부에게서 태동한 것이다.
프랑스의 저명한 문화지리학자로서 인류학자로 이름 높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와 함께 프랑스 인류학 잡지 『인간(L'Homme)』의 창간을 주도하기도 했던 저자는 다년간의 현지 답사와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쌀과 문명, 그리고 그 문명을 일구어낸 사람들에 관한 수수께끼를 풀어간다. 그리고 중국, 한국, 일본, 타이완, 타이, 베트남,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인도, 마다가스카르에 이르기까지 세계 곳곳에서 전통적인 벼농사를 통해 나타나는 인간적 풍경을 이 한 권의 책에 담아내었다. 이 책을 통해서 독자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던 우리 주변의 평범한 논 풍경에서 인류의 문명과 관련된 새로운 가치를 찾아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책 속에서
“인간은 벼의 경작을 통해 풍경을 만들어낸다. 수경 벼농사는 산과 평야에서 물리적 제약이 아니라 문명을 형성한다. 문명의 경제적 조건을 논할 때, 종종 무시되기는 하지만 찬탄할 만한 기술능력에 대해서는 산에서의 수경 벼농사보다 더 의미 있는 것이 없다.”(27쪽)
“‘먹는다’라는 단어는 베트남어, 일본어, 산탈리어, 라오어, 시암어 그리고 다른 언어에서 ‘쌀을 먹는다’는 의미로 통용된다. 아침쌀, 점심쌀, 저녁쌀은 일본 규슈 지방에서 세 끼의 식사를 가리킨다. ‘논사람’이라 불리는 캄보디아 농부는 벼, 껍질 벗긴 쌀, 빻은 쌀, 끓인 쌀, 구운 쌀을 지칭하는 특별한 단어를 사용한다. 쌀은 신의 은총을 받은 초자연적 힘이다.”(50쪽)
“이전까지 행복한 농부를 언급한 연구를 본 적이 있는가? 중국이나 인도 농부, 랑그도크나 보베 농부, 성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도나투스파 교도, 로마 영토의 노예, 11세기의 농노, 위대한 러시아의 농부, 피라미드 건축의 인부나 이집트 비잔틴의 농부, 사하라 사막 오아시스의 농부 혹은 미국 대농장의 노예 등 모든 농부의 모습은 언제나 견디기 힘들다. 우리는 이 오래된 불행을 애석해하면서 싼값에 양심의 위안을 얻는다. 우리는 우리 시대의 이념, 관례, 편견을 과거의 사실에 적용시키는 시대착오의 한복판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닐까?”(287쪽)
차례
서문
Chapter 1 벼농사의 선택
Chapter 2 노동과 제식
Chapter 3 농지 개간에서 논농사까지
Chapter 4 아시아 계절풍 지역의 전통적 논농사
Chapter 5 마다가스카르의 논농사
Chapter 6 검은아프리카와 벼농사
Chapter 7 아시아 강과 대규모 수리시설
Chapter 8 강과 탁월한 제방 체계
Chapter 9 중국의 논
Chapter 10 전통적 벼농사의 미래, 일본의 예
색인
지은이
• 피에르 구루(Pierre Gourou)
- 1900-1999년 튀니지 태생. 프랑스 지리학자
- 브뤼셀 대학과 콜레주 드 프랑스 대학 교수 역임
- 1961년에 에밀 방브니스트,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와 함께 프랑스 인류학 잡지 『인간(L'Homme)』 창간 주도
- 주요 저서 : 『아시아(L'Asie)』(1953), 『아프리카(L'Afrigue)』(1970), 『축복받은 땅, 열대지방(Terres de bonne, Le mande tropical)』(1982) 등 그 외 14편
옮긴이
• 김길훈(金吉薰)
- 프랑스 엑스 마르세이유 대학 D.E.A / 전북대학교 불문학 박사
- 전북대학교 프랑스학과 교수/인문영상연구소장
- 주요 저서 및 역서 : 『프랑스 예술과 성』(2008), 『장-뤽 고다르』(2009) 등 그 외 다수
• 김건(金建)
- 파리 1대학 영화학 박사
- 전북대학교 프랑스학과 겸임교수/전주국제영화제 부집행위원장
- 주요 저서 및 역서 : 『디지털 시대의 영화산업』(2007), 『장-뤽 고다르』(2009) 등 그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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